<일상 생활 문제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해법 찾기>
1.<동조>에 대한 사례
얼마 전 모임 중 지인이 중학생인 아들의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이 전하는 내용의 요지는 아이가 반 아이들을 선동하여 자신의 입장을 난처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촉발된 사건은 학교에서 시행하는 소풍에 관한 것이었다. 지인의 아들은 소풍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단지 말을 했을 뿐이고, 이에 반 친구들 중 20명 이상이 소풍을 가지 않겠다고 하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여기에 친구들에게 동참하라는 압력이나 설득은 없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전해들은 모임 내 구성원들의 의견은 주로 그것이 선동인지 아닌지, 아이나 교사가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들이었으나 여기서는 사회 심리학적 관점에서 <동조>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소풍은 내게 단순히 즐거운 행사정도의 의미였다. 하지만 이 사례에서는 소풍을 <한 아이의 거부로 인해 무너진 동조>라는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동조>란 타인이 어떤 행위를 하기 때문에 자의적으로 그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결정을 내리기 모호한 상황에서 흔히 타인의 행위를 판단기준으로 삼아서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동조를 일으키는 중요한 두 가지 요인은 첫째, 타인의 행동이 현실 판단에 유용한 정보가 되기 때문이다. 즉 행동의 근거가 되는 정보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둘째, 사람들은 타인에게 인정받거나 배척당하지 않으려고 타인의 입장에 동조한다는 것이다.
학교 행사인 소풍은 이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지극히 관례적으로 학생 모두가 참여하는 행사이므로 대부분의 학생들이 참여를 하게 되고 이는 모호한 의지를 가진 학생들에게도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일종의 정보를 제공하게 된다는 점, 또 중학생이라는 한참 또래관계에 민감한 청소년기에 친구들 사이에 혼자 배척당할지도 모르는 선택을 하기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사례에서 학교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참여여부를 가정통신문을 통해 조사했다고 한다. 여부를 묻는 것이기에 당연히 학생들은 소풍참여에 대해 자율권을 가지게 된 셈이지만 위에 설명한 동조의 요건 때문에 딱히 참여하고 싶지 않았던 아이들도 참여에 동조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만장일치였던 동조량은 단 한명의 이탈자로 인해 급감하게 된 것이다. 이는 애쉬의 선분실험이후 실시한 후속실험에서 실험 협조자들의 대답이 만장일치인 경우에 비해서 이탈자가 있을 경우에 동조량이 1/4로 급감한 것과 같은 현상이다.*
동조의 현상으로 바라본다면 이 사례는 아이나 교사의 인성, 자질의 문제와 전혀 다른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학교에서 진행되는 많은 행사들이 개인의 기호와 상황을 배려하지 못하는 조건하에 이루어진다는 이해를 갖추게 하며 교사와 학생 사이에 반항과 강압이라는 개념을 굳이 적용할 필요가 없게 만들지도 모른다. 학생들의 다양성을 수용하기에 시스템의 한계가 있다면 수용하지 못할 설문지는 처음부터 수합하지 않는다거나, 설문지에 학교 행사의 좀 더 학생들의 언어로 타당한 설득력 있는 참여유도문구가 도움이 된다고 본다.
*1)참고문헌 현대심리학의 이해 443p
2.<집단극화>의 사례
내가 자주 이용하는 커뮤니티엔 매우 활성화 된 게시판이 있다. 이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에는 적으면 대여섯 개, 많으면 수 백 개의 댓글이 달리는 정도이며 유심히 살펴보면 그 댓글에는 일종의 흐름이 반복적으로 발견된다. 바로 <집단 극화>이다.
<집단극화>란 한 문제에 대해 개인적으로 결정을 할 때보다 집단의사결정을 할 때 더 극단적이 되는 현상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집단 구성원의 전반적 성향이 모험적이라면 집단 상호작용 후에는 더 모험적인 결정을 하게 되고, 그리고 전반적 성향이 보수적이라면 집단결정은 더 보수적이게 된다. 즉, 집단토의와 같은 집단 상호작용 이후 구성원의 태도나 의견의 평균은 상호작용 이전의 평균과 동일한 방향으로 더 극단화된다는 것이다.*
지금, 대통령선거가 있는 계절이기도 하고 커뮤니티 자체가 정치적인 관심도 많은 편이어서 정치 관련 글들이 자주 올라오는데, 한 예로 누군가 현 정권의 잘한 점과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는 내용들을 나열하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이 글에 대한 댓글이 굉장히 많이 달렸었는데 앞서 말한 집단 극화의 흐름이 전형적으로 드러났던 것으로 기억된다. 처음 열 개 정도는 그런 면이 있는가하는 정도의 중립적인 댓글이 주를 이루었지만 커뮤니티 자체가 정치적으로 진보 쪽으로 편향된 성향을 가졌기 때문에 차츰 근거를 반박하는 댓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30개 정도를 넘어가면서는 그 반박 근거들이 종합되고 정리되면서 중립적 댓글은 거의 보이지 않거나 하나쯤 보여도 직접적인 비난과 야유를 받고 지워지곤 하였다. 진보적인 정치적 성향을 가진 주장들이 상호작용을 한 결과 증폭되어 극단화된 사례이다.
다른 이슈에 대해서도 전형적인 예는 자주 보인다. 또 한 번은 한 회원이 반려동물을 알러지로 인해 더 이상 키우지 못하고 파양해야하는 사연에 대해 올린 적이 있다. 만약 내 친구나 가족의 이야기로 같은 내용을 1:1로 들었다면 수긍할 법한 이야기라고 개인적으로 판단되었다. 그러나 이 글에 대한 댓글도 집단극화의 흐름을 따랐다. 역시 초반 댓글들은 따뜻한 위로라던가, 대안을 제시하는 내용들이었지만 점점 추가되는 댓글은 반려동물 파양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파양하는 사람에 대한 인격적 모독도 주저 없이 이어졌다. 초반의 ‘파양은 그래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던 부드러운 어투는 집단의 지지를 더해가며 날카로운 표현으로 변해갔다.
집단극화의 발생 원인은 정보와 규범의 영향력이다. 혼자서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주장을 접하면서 풍부한 근거를 확보하며 공식적 의사표현과 태도를 강화하는 경향을 가진다. 또 다른 이와 비교하여 내 주장의 타당성을 검증하려고 하여 다른 이보다 더 경쟁적으로 집단의 규범에 부합하는 쪽을 강하게 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예에서 이러한 현상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많은 장점을 지닌 커뮤니티여서 자주 들르곤 하지만 특정 주제에 접어들면 집단이 조금은 광적인 반응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개인으로서의 개인과 집단 내에서의 개인이 과연 동일인물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아마도 댓글 수를 10개 이내로 제한 한다던가 한다면 조금 과격하고 극단적인 표현으로 서로를 상처 주는 일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도 생각해본다.
*2)참고문헌 현대심리학의이해 450p